일본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1. 개항의 고장 - 요코하마
2022-07-13
내가 섬기는 신일교회는 

2020년과 2021년을 선교의 해로 정하고 

그 행사의 일환으로 2020년 2월 7일부터 2월 10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일본의 자매교회인 

도쿄의 구온(구원 久遠)그리스도교회 방문과 아울러서 

일본 개항 이후 선교사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요코하마와 도쿄일원의

일본 기독교 유적을 돌아보는 비전트립을 하기로 하였다.


일본과의 관계가 아직 경색되어 있는 터라  

일부 교우들의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자매교회와 어느 정도 약속이 되어 있는 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도 없고

정치 외교 분야에서 갈등이 있을수록  

믿음 안에서 한 형제된 우리가 

갈등을 조금이라도 해소시키는 사역을 담당해야 한다는 뜻에서  

계획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출발 일주일 정도를 앞두고 

국내에서도 우한폐렴 1호 확진자가 나오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출발하기로 했다.

2007년에 한번 가봤던 자매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일본 땅은 2014년에 오사카, 나라, 교토를 다녀온 지

6년 만에 가는 것이니 꽤나 오랜만이 되는 셈이다.

참, 2018년 11월에 대마도를 1박 2일로 다녀왔으니

대마도도 일본 땅이라고 치면 얼마 되지 않기는 했다.

 

김포에서 하네다로 가는 공중 길...

나는 한창 출장을 많이 다닐 때에도 

주로 창가의 좌석을 고집해왔다. 

구름 위에서 갖가지 모양의 구름을 내려다보는 것도,

 공중에서  지상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창가의 좌석 중 날개 위 좌석은 참 애매한 자리다.

날개에 가려 그 좋은 풍경들을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다 비행기가 방향을 바꾸느라 

약간 기울어지면 이런 풍경이 보이긴 한다. 



 


 

짧은 비행시간이라 기내식을 먹다보니 

어느 새 일본 땅이 아래에 보인다.

 

 

 

나고야 상공...

 

 


 

일본 제일의 상징인 후지산.

 


높이(3766미터)도 높이려니와

 

 

좌우 대칭에 가까운 그 모양 때문에,

 

 

그리고 주변에 이에 필적할 만한 아무런 자연물이 없어서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그 위용 때문에,

 

 

일본말의 표현을 빌리자면 

앗사리(あっさり  : 담박하게, 산뜻하게)한

 


  자태 때문에 더욱 일본다운 산이다.

 

 
산은 한국인인 내가 봐도 아름답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는 사실 카메라 셔터를  아무렇게나 막 누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비행기 창을 통해서 사진 찍는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웠다.

 

 
 사진을 찍는데 경제적인 부담이 줄어든 디카 초기 시대인

 


  2000년 대에 들어와서 도쿄 쪽으로 몇 번 출장을 왔지만

 

 
후지산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비행기에서 찍은 후지산 사진은 있기는 하지만 ′별로′였는데

 

 
 이번에 아쉬운 대로 날개 위 좌석에서 틈틈이 후지산을 찍을 수 있었다.

 

 

 

 

 

 옛날 고교 시절 지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한라산과 같이 용암의 점도가 낮아 멀리 퍼져나가는 아스피테,

 

 

용암의 점도가 높아 울릉도 성인봉같이

 

 

경사가 급한 화산의 모양이 되는 톨로이데,,

 

 

그리고 점도가 적당한 데다가 균일하게 퍼져 내려간 후지산의 코니데... 

 


 

 


 

 날개에 가렸다가 다시 나타났다가 숨바꼭질을 거듭하는 와중에

 

 

그래도 사진 몇 장을 건졌다.

 

 

저 멀리 있는 후지산을 내 카메라 렌즈가 허용하는 만큼 당겨본다.

 

 

 

그리고 곧 요코하마 항구를 내려다보며 하강한다.

 


뉴스에서 본 코로나 환자를 실은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날개 때문에 찍지 못하다가 겨우 찾았는데 꼭대기 부분만 보인다.

 


 

 


 

곧 하네다 공항에 닿는다.

 

 

미안하게도 구원교회 히사다 장로님 부부를 비롯해서

 

 

교우들 대여섯 분이 하네다 공항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1993년에 맺은 자매교회의 관계 속에서

 

 

그동안 여러 차례 오고 가는 교류를 끈끈히 이어온 구원교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조금 부족한 듯한 친절함이 몸에 밴

 

 

그들의 환영을 공항에서부터 맛본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오늘 내일 버스에서 이동 중에 먹으라고 간식까지 

 

 

한 사람에 한 봉지씩 준비해 오신 그 정성은 감동받을 만하다.

 


 



 

기내식으로 아침 식사 해결은 했지만 때가 되니 배가 출출하다.

 

 

요코하마로 가는 도중에 일식당에 들른다.

 


 

 

 


 

오랜만에 일본 본토에서 대하는 일본 음식.

 

 

일본 음식다운 색깔과 모양이 난다. 

 


 

 

식사 후에 제일 먼저 간 곳이 요코하마 개항자료관이다.

 

 

개항자료관 맞은편에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있어서 보았더니

 

 

요코하마시가 소속되어 있는 카나가와현(神奈川県)청사이다.

 


 

 

 

 

먼저 요코하마개항자료관을 본다.

 

 

일본과 서양과의 교류는 16세기 규슈 일대를 거점으로 시작된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규슈의 타네가시마(종자도 種子島)에 들러 화승총을 전해주고

 


1549년에는 스페인 출신인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등이

 

 

천주교 선교를 한 것이 일본과 서양과의 최초의 교류였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조선 침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같은 경우는 가톨릭 신자로서

 


포르투갈의 신부 세스페데스를 종군 신부로 대동하기도 했다.

 

 

한때 일본 내의 가톨릭 신자는 65만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을 지배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운 도쿠가와 막부.

 


막부를 현재의 도쿄인 에도(江戶)로 옮겼기 때문에 에도막부라고도 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200여 년간 쇄국정책과 기독교 탄압 정치로

 

 

카톨릭신자 다수를  학살하고 외부와의 교류를 철저히 단절시킨다.

 

 

유일하게 허용된 것이 규슈 나가사키에 설치한 네덜란드 상관을 통한 무역이었다.

 


 

 


 

그로부터 200여 년 후인 1853년,

 

 

그러한 일본에 큰 충격을 준 것이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요코하마 앞바다에 나타난 흑선(黑船 쿠로후네)의 출현 사건이었다.

 


서양의 배는 이전에도 검은색을 띠어서 흑선이라고 하긴 했지만

 

페리가 몰고 온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증기선은

 

 

이를 처음 보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놀라움에 빠지게 한다.

 


그 현장이 바로 이 요코하마인 것이다.

 

 

다음 해인 1854년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진다. 

 

 

이후 여러 나라들과의 교류가 시작되고

 

일본은 근대화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중세 사무라이의 시대는 가고 제국주의 일본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이신(명치유신)도 개국에 따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진 지 불과 20년 후인

 


1875년 조선 침략의 첫걸음인 운양호사건(강화도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개항자료관에 들어가자 벽에 붙은 기념판이 있어서 찍어본다.

 


 

 


 


 

살영(사츠에이)전쟁 기념 명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살(薩)은 명치유신 때 적극적으로 왕정복고를 도왔던

 

 

규슈의 사츠마번(薩摩藩)을 말하고 영(英)은 영국을 말한다.

 


′이 명판은 1863년(문구 3년) 8월 16일에 가고시마에서 일어난

 

 

사츠에이 전쟁에서 희생된 영국 장병을 기념하여

 


요코하마에 주재하던 영국인이 만들어

 

 

이 건물에 설치한 것이다.(연대 불명)

 


 

사츠에이 전쟁은 1862년(문구 2년) 8월 21일에

 


나마무기촌( 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에서 일어난

 


사쓰마번의  무사들에 의해 영국인 살상 사건(소위 나마무기사건)의

 

 

배상금을 둘러싸고 사츠마번 과 영국인들이 싸웠던 전쟁으로서

 

 

요코하마와 관계가 깊다는 이유로 만들어진 것으로 사료된다.

 


 

 


 


 

임진왜란 전의 서양과의 교류가 주로 규슈를 무대로 한 것이었다면

 

 

19세기 서양과의 교류는 요코하마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어 드니 큰 나무가 서 있는 마당이 나오고

 

 

마당 반 바퀴를 돌아서니...

 


 

 


 

돌판 위에 붙여 놓은 그림이 눈에 띈다.

 

 

1853년 미국 페리(Perry) 제독의 요코하마 상륙 장면이다.

 

 

이 그림의 오른쪽에 보이는 나무가 바로 위의 사진에 있는 나무라고 한다.

 

 

玉楠の木(다마쿠스노 키)라고 되어 있는데 찾아보니 녹나무라고 되어 있다.

 


이듬해인 1854년 이 개항자료관에 있는 이 나무 부근에서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져서 일본이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다.

 


 

 


 

 

흑선(黑船 쿠로후네)의 출현에 일본은 큰 충격을 받고

 

 

개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개항이 일본을 근대 식민지 경영 국가로 바뀌게 하리라고는

 

 

바로 옆에 살던 조선의 어느 누구도 몰랐을 것...

 

 

따지고 보면 역사의 물줄기는 순간의 사건으로도

 

 

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지도자의 판단과 결단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자료관으로 입장해서 사진을 서너 장 찍고 있는데 직원이 지적을 한다.

 


실내에서는 사진 촬영 금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은 사진은 불과 서너 장...

 

 

 


 


 

2층으로 되어 있는 자료관에는 개항 이후 1920년 대에 이르는

 

 

요코하마의 변화를 잘 볼 수 있었다.

 


달리 사진이 없으니 자료관에서 받은 팸플릿을 스캔해서 올린다.

 


 

 

 

   

 

 

 

 

 

 

 


 

자료관 옆의 그리 넓지 않은 광장이 개항 광장이다.

 

 

개항 광장 바로 옆에 교회가 보인다.

 

 

카이간(해안 海岸)교회 - 일본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이곳에 예약된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다고 해서

 

 

먼저 조금 떨어진 곳의 시로(지로 指路)교회로 먼저 가보기로 했다.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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