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의 발자취를 찾아서 11. ′Loomis, Friends of the East′(루미스, 동양의 친구)에 나타난 이수정
2022-09-22



(사실 이 여행기의 본 편은 아래의 책으로부터 쓰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빨간 글로 표시한 부분에서 막혀 버렸다.


그래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 이것 저것 조사하다보니


위의 7~10내용들을 정리하게 된 것이다.)



 


이수정에 대한 기록을 시로교회의 초대 목사이자

 




 

재일본 미국성서공회 총무였던 헨리 루미스 선교사의 딸인


클라라 루미스가 쓴 ′Loomis, Friends of the East′에서


해당 부분을 번역, 인용해본다.


 

 

 

 

 

 

 

 

 

 

 

 

 

 

′ 1881년 7월 루미스 목사가 캘리포니아에서 도쿄에 온 지 2개월 후에

조선으로부터 사절단이 일본으로 왔다.

말총으로 된 검은 색의 높은 모자(갓)를 쓰고 하얀 비단 관복을 입은

그 단원들은 거리를 지나가는 동안 큰 관심을 끌었다.

단장인 박영효(Pak Yan Hio)는 인부들이 멘 가마에 타고 있었다.

그는 조선 조정의 고관이자 선왕의 부마였다.

그 수행원 중에는 일본에서 그 분야에서 가장 권위자라고 알려진

츠다 (센)에게 선진 농사법을 배우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츠다에게 방문했을 때 츠다의 방에서 긴 한문 두루말이를 보았는데

그것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츠다는 기독교인이었고 한문 두루말이는 바로 산상수훈이었다.

츠다가 그 두루말이를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을 했는데

그는 기독교는 조선에서 금지되어 있고 만일 그 족자가

그의 소지품 속에서 발견되면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조선에 돌아가서 그의 친구에게 그것의 중요성을 털어 놓았다.

그 친구가 학자이자 왕궁의 사관이었던

리츄테이(Ree Chu Tei 이수정의 일본식 발음은 ′리슈테이′일텐데

클라라 루미스는 ′리츄테이′로 쓰고 있다.)이었는데

그는 수년 전 겨울 밤 반란으로부터 왕비를 구해서 등에 업고

피신시킨 일로 왕비의 높은 신임을 얻고 있었다.

 

애국적인 이유로 그는 어떤 다른 외래종교와 같이

기독교에 대해서도 항상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그의 친구의 이야기가 그의 호기심을 일깨웠다.

일본정부로부터 도쿄제국대학에서 조선어를 가르칠 사람을 구한다는

요청이 있었을 때 그는 기쁘게 그 직책을 맡을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타국의 문명을 조사해보기로 결정했다.

이수정은 도쿄에 도착하여 츠다를 만났고 그를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배웠고 한문 성경을 얻게 되었다.

기독교를 좀 더 공부하고 방향을 잡기 위하여

그는 조지 윌리엄 낙스목사와 일본인 야스카와목사에게 보내졌다.

그 자신의 학자로서의 명성과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정으로

그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미스목사가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내어

성경을 그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데 시간을 들이도록 주선했다.

이 일을 위하여 그는 그의 남는 시간과 정력의 전부를 쏟기 시작했다.

1883년 그는 (미국)성서공회에서 발행한 마가복음 번역을 끝내었고

추가 번역을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당시까지는 조선에는 선교사가 없었으나

루미스목사는 조선에 선교사가 파견될 때는

이수정의 노력으로 적어도 한글성경 초안이라도

준비가 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수정의 동생이 일본을 방문하기를 희망하던 중,

형이 체제비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1000엔을 가지고 왔다.

이수정이 더 이상 산업이나 농업을 공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실망한 동생은 형을 보고 돌아가자고 했다.

이수정은 "나는 돈을 원하지 않아. 그리고 철도, 전보, 기선 같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발견해서 돌아갈 수 없어."라고 답한다.

동생은 일본에 더 오래 있지 않고 귀국했으나

귀국 전에 루미스목사를 방문해서 조선으로 오라고 초청했다.′

 

그런데 이 다음에 나오는 문장이 이상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글성경 번역의 진척에 있어서는

그는 신중하지 못한 애국자이자 정치가였다.

동생의 방문 직후 그는 일본이 그들의 목표대로

한국의 개화파를 재구성하려는 구상을 걱정한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성경의) 공부와 번역에서 점점 멀어지고

1886년 5월 마침내 그의 조국으로 귀국했으나

집권 중인 수구파에 붙잡혀 그들에게 반대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로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것이었다.′

 

위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보고는 이 글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루미스 목사의 딸이 쓴 붉은 색 부분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부분과 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중하지 못하다니...

이수정을 극찬했던 루미스목사가 아니던가?

실제 상황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며칠을 두고 이수정, 李樹廷, 헨리 루미스, Loomis 등등을 가지고

미국 야후, 일본 야후, 한국 검색엔진, 구글 등

찾을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보았는데 규명하기가 어려웠다

여행기는 마쳐야 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것 같은데

하는 수 없이 나대로 짐작해본다.

 

위에 이수정이 루미스목사에게 했다는 말이 하나 있다.

성경 모두를 번역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루미스목사가 바란 것은 이수정이 일본에 남아서

성경 전체를 번역해주기를 기대한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이 일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루미스목사에게 있었을 텐데,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 일에 적합했던 인물이

이수정이어었는데 조선으로 들어가버렸으니

루미스목사의 실망감은 대단했을 터였다.

그것에 대한 실망감을 나중에 딸인 클라라에게 이야기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조선에 돌아간 것이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는 것 아니었을까?

루미스가 전해들은 것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지가 절단되는 형을 받아 죽음을 맞았다는,

이수정의 최후를 맞게 한 그의 잘못된 귀국을

안타까워 해서 그런 표현을 딸에게 했을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이수정...

어찌보면 인간적으로 외로웠을 일본에서의 생활은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과 교유하면서

새로운 진리를 하나하나 발견하면서 나아가는 즐거운 길이었으리라.

이수정 뿐 아니라 이곳에서 본 여러 선교사들의 삶도

머나먼 동양, 타국에 와서 앞날이 어떻게 전개될 지도 모르는

답답함 속에서 모든 답은 하나님께 구하면서 사역해 나갔으리라.

그들을 통해서 복음의 빚진 자가 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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